고종 때도 있었다···대한민국 최장수 브랜드 '활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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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브랜드 열전.ZIP'은 한국 근현대사를 거쳐 지금까지도 업계를 이끌고 있는 국가대표급 브랜드들을 들여다봅니다. 이들 브랜드의 생존 철학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들의 미래 구상에 작은 단초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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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가 잘 안될 때,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약이 있습니다. 바로 활명수.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으로, 한 병 마시면 금세 속이 가라앉는 경우가 많습니다.

뛰어난 효능을 인정받아 연간 총 생산량은 약 1억 병, 지금까지 누적 판매량은 약 85억 병이나 됩니다. 시장 점유율 70% 이상을 차지하며 '소화제의 대명사'라고도 불리는데요.

'국민 소화제' 활명수, 언제부터 만들어진 걸까요?

활명수의 역사는 12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는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즉위한 1897년인데요. 당시 궁중 선전관이었던 민병호 선생이 한국 최고(最古) 브랜드인 '부채표 활명수'를 탄생시켰습니다.

궁중한방 비법을 공부해 한약 지식이 풍부했던 민병호 선생. 미국 선교의사 알렌을 통해 양의학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후 궁중 비방과 서양 의학을 접목해 소화불량 약인 활명수를 만든 것이지요.

당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풀뿌리와 나무껍질, 즉 초근목피로 보릿고개를 넘기던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가장 흔한 질병 역시 위장장애와 소화불량이었는데요. 급체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빈번했습니다.

민간요법에만 의지하던 시절에 등장한 활명수는 그야말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었습니다. 당시 활명수는 한 병에 50전, 현재 시세로 2만 원 정도로 만만찮은 가격이었지만 효력이 좋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활명수를 만든 '동화약방'도 승승장구했습니다. 동화약방의 창업자는 민병호 선생의 아들인 민강 초대사장. 민강 사장은 활명수로 번 돈을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직접 독립투사로도 적극 활동한 민강 사장은 옥살이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1년 별세했습니다. 이후 동화약방도 경영 위기를 맞았는데요. 독립운동가 보당 윤창식 선생이 인수하면서 재도약에 성공했습니다.

동화약방은 1962년 '동화약품 공업주식회사', 2009년 오늘날의 '동화약품 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했습니다. 동화약품은 후시딘·판콜 등 수많은 의약품을 만드는 제약회사로 자리매김했지요.

하지만 활명수의 명성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1910년대부터 활명회생수, 활명액을 시작으로 90년대까지도 유사품들의 출시가 끊이질 않은 것.

이에 동화제약은 1990년대부터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문구를 내세워 브랜드 차별화에 나섰는데요. 이 '부채표 캠페인'을 통해 소화제 대표 브랜드로 입지를 온전히 다지는 데 성공합니다.

물론 활명수가 국민 소화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바로 탁월한 효능. 여기에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탄산 첨가, 성분 보강 등 진화를 거듭해온 점 또한 빼놓을 수 없겠지요.

대한민국 최장수 브랜드 활명수. 3세기에 걸쳐 살아남고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좋은 약으로 대중을 구하겠다'는 믿음과 함께 현대인의 생활 방식에 맞춰 변화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성공만 보며 달리기에 앞서 '고객'의 마음을 헤아리기. 코로나 시대를 지나는 우리에게 던지는, 활명수의 가르침이 아닐까요?

박희원 기자 parkheewon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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