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테마 에세이|<바가바드기타>] ⑩ 제1권 11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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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불안하십니까?”

이기적인 인간은 불안하고 이타적인 인간은 평온하다. 이기적인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다나오스의 50명 딸들의 심정과 같이 같다. 이들은 밑 빠진 항아리를 물로 채울 수 있다고 착각하고, 쉬지 않고 물을 붙는 형벌을 당한다. 항아리에 물이 차지 않아 불안하다. 그 욕망의 특징은 한계가 없다는 점이다. 자신의 이기심을 직시하고 그것을 중단시키려는 노력과 연습이 없다면, 욕심은 그들 영원히 성취 못할 신기루와 같은 어떤 것을 갈망하게 만든다. 매일 매일 점점 더 커지고 멀어지는 욕망의 대상은, 그 사람을 점점 비참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카우바라의 왕이자 이기심의 상징인 드르요다나는 군대 사령관 비슈마의 능력을 찬양한다. 그리고 비슈마를 실제로 돕는 용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준다. 비슈마가 군대전체를 이끄는 대장이지만, 나이가 들어 민첩하지 못했다. 그는 용사들에게 실제 전투가 시작되면 비슈마를 보호하라고 명령한다. 비슈마는 전투 전체의 방향을 총괄하는 전략가이기 때문에. 용사들은 각자의 전략적 위치에서 대오를 흐트러뜨리지 말아야한다. 드르요다나는 카우바라 군대의 승리는 비슈마의 지혜와 안전에 있다고 판단한다. 드르요다나는 <바가바드기타> 제1권 10행에서 다음과 같이 주문한다:
ayaneṣu cha sarveṣu yathā-bhāgamavasthitāḥ
아네슈 차 사르베슈 야타-바가마바스티타흐
bhīṣmamevābhirakṣantu bhavantaḥ sarva eva hi
비슈마메바비락샨투 바반타흐 사르바 에바 히
(직역)
“모두 자신에게 각자 맡겨진 위치에서 전략적으로 움직이면서.
너희들 모두, 최선을 다해 비슈마를 보호하라!”

(의역)
“파우바라 군대의 스승 드로나와 오감의 자극과 중독에 경도된 카우바라의 주력부대와 지원부대 여러분!
쿠루크세트라라는 평원에서 여러분에게 할당된 각자의 위치를 굳건히 지켜라.
그리고 제군들을 평원에서 지원하는 총사령관이자 이기심의 상징인 비슈마를 보호하는데 집중하라.
비슈마는 인간의 중추신경계와 같아, 그것이 파괴되면, 모든 군대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드루요다나는 불안하다. 불안이란 평온하지 않은 상태다. 평온하지 않는 상태란 자신의 고귀한 마음을 둘 수 있는 그 대상의 부재이며, 그 대상을 발견했더라도, 몰입할 수 없는 들뜬 마음이다. 드루요다나는 자신이 치리하는 나라의 국경을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정복하고 확장해야할 영토가 자기 권력의 영향을 끼치는 한계이자 국경이라고 여긴다. 그의 허상 속에 존재하는 경계가 그가 치리할 나라의 국경이다.


인간의 육체는 수련과 단련을 통해 제어하지 않는다며, 인간의 영혼을 어둡게 만들거나 작동하지 못하게 만든다. 육체의 욕심과 이기심이 그의 영혼을 노예처럼 부린다. 물질적인 욕심이 명상을 통해 강화된 영적인 평온으로 정복되기 전에는, 그 사람을 좌지우지하며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바가바드기타> 1.4-9은 크루크세트라 평원에 집결한 카우바라 군대와 판두군대의 용사들과 사령관들을 소개하였다. 이들의 힘은 막상막하다. 카우바라 군대가 상징하는 모든 악의, 욕심, 그리고 나쁜 습관은 그것들에 대항하는 판두군대가 상징하는 선의, 배려, 그리고 좋은 습관들에 의해 조절되고 있다. 요가수련자는 가장먼저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악취가 나는 생각과 언행을 제거하기 위해 수련해야한다. 판다바 군대는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진열한다. 동쪽은 지혜를 의미한다. 동쪽은 신체의 내면을 의미하며, 모든 것을 밝혀 알아차릴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의미한다. 반면에 카우바라 군대는 해가 지는 서쪽을 향해 진열한다. 그들은 신체의 외부를 의미하여, 외부의 느닷없는 자극에 반응하는 불안을 의미한다.

육체의 욕심과 자극에 경도된 자신을 응시하고, 그런 자신을 유기하는 깨어난 요가수련자는 정사正思, 정언正言, 그리고 정행正行을 일상에서 실천한다. 정사는 자신의 삶의 터전을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고 삶의 원칙을 새롭게 마련하는 수련이다. 정언이란, 정사를 통해 얻은 지혜로,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생각하여, 가능하면 침묵沈默을 수행하고, 반드시 해야 할 말은 겸손하고 강력하게 말하는 용기다. 그런 말은 그의 행위를 통해 완성하기에 정행이다.

카우바라 군대를 현장에서 지휘하는 비슈마는 ‘이기심’이다. 인간은 자신이 말하고, 생각하고 행위를 하는 주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를 지켜보면, 그런 행위를 하는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과거에 욕심에 의해 길들여지고 중독된 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다음 문장에서 등장하는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 보자:

“나는 생각한다, 나는 본다, 나는 듣는다. 나는 사랑하다,
나는 미워한다, 나는 고통을 느낀다, 나는 기쁘다.”


다양한 경험을 하는 다양한 ‘나’는 그런 경험을 주도하는 ‘나’와는 다르다. 어떤 사람이 ‘나는 장님이다’라고 말했을 때, 이 문장은 틀렸다. 두 눈이 보는 기능을 잃은 것이다. 이기심에 근거한 허상은. 나를 두 눈과 동일하게 여겨, ‘나’라는 존재를 장님으로 생각하는 착각이다. ‘나’를 특정한 대상을 경험하는 ‘나’와 동일시한다면, 경험에 의해 한정된 ‘나’가 인간의 의식을 작동하게 하는 궁극적인 나를 잠재운 것이다.

여느 사람에게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다. 그런 ‘나’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 만들어진 지적이며 감각적인 나다. 상키아 철학에서 말하는 ‘프라크리티’ 즉 물질세계에서의 ‘나’라는 존재이지, 우주와 하나일 뿐만 아니라 우주를 탄생시킨 ‘프루샤’로서의 ‘나’가 아니다. 그런 진정한 나를 ‘파라마트만’paramātman (परमात्मन्,)이라고 부른다. 파라마트만은 ‘원초적인 자기-자신’이며 ‘초월적인 자기-자신’이다. 산스크리트어로 ‘파라마’는 ‘숭고한; 탁월한’이란 의미이고 ‘아트만’은 ‘자신’이란 뜻이다. 파라마트만은 랄프 왈도 에머슨의 ‘오버소울Oversoul’이며 니체의 ‘위버메쉬Übermensch’이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신으로부터 전해들은 신명인 ‘에흐에 아쉘 에흐에’ehye asher ehye다.

인간은 잠을 통해, 외부로부터 인정받기에 경도된 ‘페르소나persona’로서의 ‘나’가 벗겨지고, 자신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파라마트만’의 흔적이 여기저기 등장한다. 인간은 잠에서, 사회가 부여한 직함, 소유, 명칭, 그리고 모습이 사라진다.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차이가 사라진다. 나는 원초적인 자신과 하나가 되어, 숭고한 나와 합일하는 ‘스스로 존재하는 나’로 거듭난다. 그런 나를 일깨우지 못하도록 조정하는 자가 바로 ‘비슈마’다. 이기심에 경도된 오감들은 자신들의 조절하는 ‘비슈마’를 목숨처럼 지키려고 분투한다. 나는 어제까지 만들어진 이기적인 ‘나’를 충족시키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나에게 감동적인 초월적인 나를 일상에서 조각하기 위해 가만히 정진하는 ‘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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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다나오스 소녀들, 영국 화가 존 윌리엄스 워터하우스 (1849–1917) 유화, 1903, 154.3 cm x 111 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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